음악 속의 하느님 - 하느님은 내마음속에
때가 때인지라 부활을 노래하는 음악 외에는
다른 곡에서 하느님의 기묘한 능력과 은총에 감사하며 찬미, 찬송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부활찬송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며
그 감동 또한 엄청난 힘으로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감수성은 아닐 것이다.
의무적이라 할 만큼 종교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한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작품들 가운데 서두에 소개할 곡은 ‘Christ on the Mountain of Olives(올리브 동산 위의 그리스도)’이다.
이 곡은 너무 무겁고 지나치게 지루하다는 혹평을 받은 베토벤의 유일한 오라토리오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 곡은 ‘천사들의 합창’이란 제목으로 부활절에 많이 부르며
연주곡의 주요 레퍼토리로 선택되는 유명한 작품이다.
테너(예수 역할을 테너 파트로 하였다는 것도 논란의 대상으로 충분하였다.) 독창에서
“이제 사망 권세 이겨, 나와 함께 길이 살리라.”라는 확실한 메시지를 드러낸다.
낮은 성부에서는 겹점8분음표와 32분음표가 한 박자를 이루는 반복을 거듭하며
격정적이고 매우 탄력적인 느낌을 나타낸다.
위 성부에는 8분음표와 32분음표의 4연음부가 한 박자를 이루어
마치 천사들의 무리가 홀연히 나타나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느낌을 자아내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어 빠른 두 박자로 바뀌면서 전개되는 각 성부는
독자적인 멜로디를 확보하고 서로 주고받는 형태와 화성음악 형식을 병행하며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찬미를 숨 돌릴 틈도 없이 쉬지 않고 노래한다.
그리고 합창은 “영원히 주 찬미, 거룩한 노래로.”라고 끝을 맺는다.
제2부 마지막 42번째 곡인 ‘알렐루야’ 합창이다.
평범하고 짧은 3마디의 전주에 이어서 울려 퍼지는 알렐루야의 반복!
너무나 위풍당당한 리듬과 선율에서 청중은 압도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연주회에 참석하였던 영국 국왕이
이 부분에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는 에피소드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겠는가.
당시의 국왕은 알렐루야의 합창 부분에서 일어섰다지만
이 합창만을 듣고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는 것일까?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미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와 우리 죄를 대신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을
말씀만이 아닌 음악으로써 전달받고
크게 느끼고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나 도저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제3곡 ‘주의 영광’, 제9곡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
제12곡 ‘아기가 태어나셨네’, 제15곡 ‘주께 영광’,
그리고 마지막 ‘아멘 코러스’까지.
베토벤의 작품에서는 독립된 하나의 합창만으로도 많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또 헨델의 작품에서는 탄생과 수난을 겪고 부활하신 과정을 총체적으로 듣고 느끼면서
그 감동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노랫말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하느님을 바르게 알 수 있을까?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라도 주님을 만나겠다는 간구도 없이 주님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것에 있을 것이다.
위대한 작곡자의 작품만이 하느님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성음악을 감상하는 이의 자세가 더욱 중요하지 않겠느냐?’라는 것이다.
오늘 소개한 대곡들뿐 아니라 소품들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우리는 이미 경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파스카 성삼일의 ‘화답송’과 ‘복음 환호송’에서도 하느님을 뵐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렐루야, 알렐루야.